4대박해이야기

신유박해 1801년

1784년 탄생한 가톨릭교 신앙 공동체는 ‘진산사건’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1795년 중국인 주문모 신부님의 조선 입국 이후 교세가 크게 확대되었고, 1800년 무렵에 이르러 신자수가 10,000명을 헤아리는 공동체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1800년 6월 정조의 사망 후 어린 나이의 순조(純祖)가 즉위하고, 그 후 견인 대왕대비 김씨를 중심으로 하는 노론 벽파가 득세하면서 가톨릭교는 또한 차례의 박해를 겪어야 했다.
임금도 몰라보고 아비도 몰라보는 무군무부(無君無父)의 무리로 간주된 가톨릭교 신자들에 대한 박해가 1801년 신유년 1월 조정의 공식적인 박해령과 더불어 시작되었던 것이다. 1801년이 신유년이기에 신유박해라 칭한다.

 

남인 시파를 제거하고자 하는 정치적 의도가 내포된 이 박해는 서울에서만이 아니라 지방에까지도 확대된 대대적이고 전면적인 박해로 가톨릭교 신앙 공동체에 큰 희생을 초래하였다.
이 박해 중에 300명 이상이 희생되었는데, 사학죄인(邪學罪人)으로 몰린 이승훈, 정약종, 최창현, 최필공, 홍낙민 등이 참수형을 당했으며, 이가환과 권철신은 고문을 이기지 못한 채 감옥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
주문모 신부님이 의금부에 자수하여 군문효수(軍門梟首)의 형을 받은 후, 가톨릭교에 대한 박해는 6년간 주문모 신부님을 헌신적으로 도왔던 강완숙을 비롯하여 주신부님과 관계했던 인물들로 확대되었다.
이 박해는 같은 해 말 황사영을 비롯하여 이른바 ‘백서사건(帛書事件)과 관련된 많은 이들의 희생을 초래하며 막을 내렸다.

 

신유박해로 인해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증조 할아버지인 김진후(비오)는 1801년부터 감옥을 드나들기 시작하더니, 1804년에는 체포되어 해미로 압송되었고, 해미성지에서 10여 년간의 옥살이 끝에 1814년 옥사하였다.
또한 작은 할아버지인 김종한(안드레아)는 1816년 안동에서 체포되어 대구 관덕정에서 참수 당하였다.

기해박해 1839년

1801년 ‘신유박해’로 인하여 지도층 인사들이 거의 다 순교하거나 유배에 처해지거나 혹은 산간 벽지로 피신함으로써 조선교회는 존망의 절대적 위기에 처한 듯 했다.
그러나 가톨릭교에 대한 박해는 교우촌의 형성과 확산 속에서 조선 사회 전역으로 파급되는 예상치 못한 결과를 초래하였고, 이전과 달리 양반이 아니라 중인 이하 신분층을 중심으로 교회가 재건되었다.
그리고 1811년과 1825년, 두 차례에 걸쳐 교황에게 서한을 올리며 지속적으로 성직자 영입 운동을 전개하는 가운데 1831년조선 대목구가 설정되고, 1836년과 1837년에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인 모방(Pierre Philibert Maubant)신부님, 샤스탕(Jacques Honore Chastan)신부님, 앵베르(Laurent Joseph Marie Imbert)주교님이 조선입국에 성공하여 사목활동을 전개 함으로써 조선의 가톨릭교 신앙 공동체는 새로운 도약의 계기를 마련하였고, 1838년 말 그 수는 9,000여명으로 증가하였다. 그러나 기해년인 1839년 형조판서 조병현을 중심으로 한 벽파(僻派) 풍양 조씨가 시파(時派)인 안동 김씨로부터 정치권력을 빼앗으려는 과정에서 신자 수 10,000명을 헤아리는 가톨릭교회는 또 다시 박해의 시련을 겪어야 했다.
1839년 기해년에 일어난 가톨릭교회에 대한 박해라 하여 기해박해라 칭하고 있다.

 

사실상 이 박해는 조정이 가톨릭교 신자들에 대한 공식적인 체포령을 발표하기 전인 1838년 말부터 서울에서 시작되어 이후 1840년 말까지 계속되었는데, 조신철·정하상·유진길 등 당시 조선교회를 이끌어가던 핵심적인 신자들이 희생되었다.
앵베르 주교님은 박해로 인한 피해가 신자들에게 더 이상 확산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홀로 자수하고 다른 두 선교사에게도 자수를 권고하였다.
이에 따라 모방 신부님과 샤스탕 신부님도 자수하였는데, 이들 모두 군문효수의 형을 받고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김효임 골롬바와 김효주 아녜스 자매가 신앙을 위해 동정을 지키다가 체포되어 순교한 것도 이 박해 시기이다.

 

기해박해의 여파로 김대건 신부님의 아버지 김제준(이냐시오) 성인은 아들을 서양에 사제 수업을 받게 하기 위해 유학을 보낸 중죄인으로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 끝에 1839년 서울 서소문 밖에서 참수 당하였으며, 당고모였던 김 데레사 성녀는 앵베르 주교의 처소를 돌보며 신앙을 전파하다 체포되어 1840년 초 서울포청에서 교사 당하였다.

병오박해 1846년

조선인 성직자 양성의 중요성을 절감한 모방 신부는 1836년 말 최양업·최방제·김대건을 신학생으로 선발하여 마카오로 보냈다.
이들 중 충청도 솔뫼 출신의 김대건은 신학교 생활을 마치고 선교사의 조선 입국로를 개척하던 중 1845년 8월 17일 중국 상해에 위치한 진쟈샹(金家港 김가항) 성당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는데, 이로써 최초의 조선인 사제가 되었다.
이후 바닷길을 통해 페레올(Jean-Joseph Ferreol)주교님, 다블뤼(Davely)신부님과 함께 지금의 강경에 잠입하여 사목활동에 투신한 그는 1846년 선교사의 입국을 위한 항로를 탐색하던 중 백령도 부근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고, 혹독한 고문과 조정의 회유 속에서도 신앙을 굳건히 증거하다 같은 해 9월 16일 서울 한강변 새남터 모래사장에서 순교하였다.
1846년 병오년에 일어난 박해이기에 병오박해라 일컬으며, 한국의 첫 사제였던 김대건 신부님의 체포를 계기로 가톨릭교에 대한 박해가 다시금 일어나 현석문을 비롯한 신자들이 순교하게 되었다.

병인박해 1866년

‘기해박해’와 ‘병오박해’처럼 가톨릭교에 대한 박해가 계속되는 가운데 많은 신자들이 희생되었다.
그러나 죽음 앞에서도 의연하게 신앙을 증거한 수많은 순교자들의 피는 더 많은 가톨릭교 신자들을 탄생시키는 씨앗이 되었고, 이전보다 더 넓은 지역에 복음이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선교사의 계속적인 조선 입국과 활동 재개로 가톨릭교 신앙 공동체는 눈에 띄는 발전을 이루었는데, 1857년에는 그 수가 15,000명을 넘어섰으며, 1865년에는 23,000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그러나 1864년 초, 고종(高宗)이 즉위하고 그의 아버지 흥선 대원군이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후, 가톨릭교 신앙공동체는 다시금 박해의 시련에 직면해야 했다.
조선에서 활동하고 있는 프랑스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아 프랑스와의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러시아 세력의 남하를 저지하고자 계획하였던 대원군이 태도를 바꾸어 가톨릭교에 대한 박해를 감행한 것이다.
병인년인 1866년에 시작된 이 병인박해는 1873년 말까지 계속되었다.
이 박해는 ‘병인양요’를 촉발하였고, 전국에서 8,000명 이상의 신자들이 희생되었는데, 박해가 일어날 당시 한국에서 있던 12명의 선교사들 중 베르뇌 주교님과 다블뤼 주교님을 포함하여 9명이 순교하였으며, 홍봉주·남종삼·황석두 등 수많은 교회의 지도자들이 그들과 운명을 같이 하였다.

 

병인박해 당시 김대건 신부님의 사촌들과 친척들은 공주황새바위에서 순교하였다.

 

병인박해로 인해 김제항, 김진식, 김근식, 김제교가 순교함으로 인해, 김대건 신부님 집안은 4대에 걸쳐 11분의 순교자를 배출하는 신앙의 명문이 되었다.